九. 소요와 무력진압
대정(大正) 8년 3월 1일 「빠고다」 공원에서 만세의 소리로써 폭발된 조선독립소요의 화(火)는 요원(燎原)의 세로써 각지를 연소하야 태(殆)히 저지할 바를 알지 못하였으니 3월 2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소요가 일어난 것으로 위시하야 5월에 이르기까지 태(殆)히 휴일이 없이 만세의 소리로써 2백여군을 훤요(喧擾)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도다. 그런즉 최린(崔麟), 최남선(崔南善) 등이 기획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를 고창(高唱)하는 시위운동을 행할 시에 과연 2백여군의 민중이 거개 향응(響應)하게 하도록 선동의 연결을 취하였던가. 오인이 본 바로써 도(圖)컨대 최린(崔麟) 등도 결코 소요가 이와 같이 확대될 것은 예측한 바가 아니요, 또는 2,3의 군회지(郡會地)를 제한 외에는 하등의 연결을 취하지 못한 것도 역시 사실이니, 선동의 연결도 없고 하등 ◯로의 상통한 것이 없이 만세의 소리가 일발함에 이구동음(二口同音)으로 궁향벽촌(窮鄕僻村)에서까지 앞을 다투어 향응(響應)한 것은 억하고(抑何故)인고. 십년에 가까운 장시일을 무단주의 탐정정책의 아래에 있어 굴신(屈伸)의 자유를 얻지 못하던 조선민중의 적울(積鬱)의 기를 설(洩)코져 함이 급함에 말미암음은 물론이어니와, 소요로 하야곰 이와 같이 자만케 한 것은 그 원인이 관헌의 진압이 철저치 못한 것과, 불령배(不逞輩)의 선동이 교묘한 것과, 조선민중의 민도(民度)가 유치한 점에 있다 하노라.
[...] 만약 소요가 발발한 당시에 진압하고 검거함이 준엄하야 진실로 소요에 참가한 자이면 가차함이 없이 엄벌에 처하고, 경찰의 힘으로 해산키 불능한 집단에 대하야는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속히 진압할 길을 취하고 곧 각 지방에 엄중히 경계를 가하였으면, 혹은 소요는 크게 자만함을 보지 아니하고 종식되었을는지 알지 못하겠으니, 미봉의 책과 고식의 계에 출한 당국의 조치가 하등의 효(效)를 주(奏)치 못하야 부득이 군대의 증파를 청하고 무력으로 진압을 행함에 이르러 태(始)히 소요가 진정에 귀(歸)한 것을 볼지면, 소요가 일어나는 당시에 바로 무력으로써 진압을 행하고 각지에 군대를 배치하야 경계를 가하였으면 소요는 순일(旬日)을 넘지 아니하여 진정되었을 것을 족히 증(證)치 아니하겠는가. 의자(意者)컨대 당시 당국의 취한 진무(鎭撫)의 책은, 소요는 2,3의 도회지에 그치리라 하고 각 지방의 향촌에까지 파급될 것은 료(料)치 못하였다가 점차 각지로 만연되고 계속하야 저지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됨에 태(始)히 낭패하여 무력을 씀에 이름과 같으니, 당국자의 용의가 주도치 못하고 사려가 치밀치 못한 것을 민련(憫憐)할 외에 무(無)하도다. 이민족을 통치하는 자가 그 민중의 정도와 심성을 도외시하고 다만 억측으로써 구안(苟安)을 도(圖)하고 태평을 꿈꿈이 엇지 가(可)하리오. 시사(試思)할지어다. 평소에 맹호와 같이 폭위(暴威)를 령(逞)하던 헌병경찰이 소요가 일어난 일로부터 돌연히 순묘(馴猫)와 같이 온순하야 태도에 출(出)함을 보고 정도가 유치한 민중이 어찌 조선이 독립되얏다는 유언을 믿지 아니하겠는가. 강화회의가 무엇인지 국제신의가 무엇인지 내정간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유언에 혹한 바 되어 독립만세를 외침이 조선인의 유일의 의무인 줄로 인식하고 이것이 범죄인 줄로 자각치 못하는 다수의 민중으로 하야금 소요의 범인이 되게 하고 나아가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여 양민족의 동화공존할 대정신에까지 악영향을 따르게 한 것은 당국자가 소요진압이 기의(其宜)를 득(得)지 못한 죄를 능히 사(辭)치 못할 바이라 하겠도다.
소요를 일으킬 때까지는 음모의 계통이 있어 연락을 취한 일이 있었으나 소요가 일어난 후 주모자 등이 아울러 검거된 이래로는 하등의 계통과 연락은 없었으나, 그러나 유언비어는 시호(市虎)를 삼전(三傳)하야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불량의 도는 각자의 의사로 불온문서를 작성하야 이를 배포하고 협박선동이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어 크게 소요를 증장(增長)함에 힘이 있었으니 불온문서와 유언비어는 아울러 황당무계하야 상식으로써 판단할지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많으나, 그러나 민도(民度)가 낮은 조선인의 민심을 혹란(惑亂)함에는 위대한 효력이 있었으니 [...]
- 김환, 「조선시국사관(8)」,『시사평론』2-5, 1923.9.15 (일부 현대어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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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문단 줄친 부분 이렇게 바꿔봐도 재밌을듯.
만약 광우병 시위가 발발한 당시에 진압하고 검거함이 준엄하야 진실로 소요에 참가한 자이면 가차함이 없이 엄벌에 처하고, 경찰의 힘으로 해산키 불능한 집단에 대하야는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속히 진압할 길을 취하고 곧 각 지방에 엄중히 경계를 가하였으면, 혹은 소요는 크게 자만함을 보지 아니하고 종식되었을는지 알지 못하겠으니, [...] 외교관행이 무엇인지 국제조약이 무엇인지 과학지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유언에 혹한 바 되어 광우병 반대를 외침이 한국인의 유일의 의무인 줄로 인식하고, 이것이 범죄인 줄로 자각치 못하는 다수의 민중으로 하야금 소요의 범인이 되게 하고, 나아가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어 한,미 양국가의 동화공존할 大정신에까지 악영향을 따르게 한 것은, 당국자의 소요진압이 마땅히 성공치 못한 죄를 능히 용서받지 못할 바라 하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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