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인용자) 오날 실제생활에서 줄기찬 그리고 굳건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비상(非常)히 곤란한 일로 되여있다. 특이성과 수미일관성을 지니면서도 굳은 신념과 행동에 대한 기민하고도 굳세인 힘을 가지고 있는 성격 - 그것은 우리가 이상 가운데서 그려보는 인물일른지는 몰라도 우리 주위에선 좀체로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다. […] 이상성격자나 도학자나 광신자나 폭한은 있어도 참된 성격은 없다. 물론 대부분은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무성격자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참된 성격을 구할 때 의례히 세계사적으론 루넷상스로 가고 일본에 있어선 명치유신으로 간다. 이 시대는 대소의 무수한 성격이 배출한 시대이다. 그런데 구라파 소설이 루넷상스에서 출발하고 일본은 근대소설이 명치초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구라파에 있어서의 루넷상스나 일본에 있어서의 명치유신은 말할 것도 없이 시민계급의 대두의 시대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 시민계급이 자기자신의 운명을 실현키 위하여 맨드러낸 예술이다. 소설은 시민의 서사시라는 말은 단적으로 이 사실을 표명한다. […]
나는 앞서서 현대생활에선 성격의 유지가 곤란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현대소설은 근본적으로 곤란하였다는 것이 이상 설명에서 충분히 명백하여질 터이다. 소설은 성격관찰에서 출발되였고 성격창조를 중심삼아 발달되어 왔다. 그러나 작가가 실재에서 성격을 잡기가 곤란하다면 그의 소설이 근본적으로 곤란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같이 시대와 정세는 변하였지만 성격의 중요성에 대한 작가의 신념만은 변함이 없다. […] 성격구성이 실재적으로 곤란 내지 불가능할 때 작가의 성격에 대한 의욕은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고 심지어 악몽으로 변한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성격창조를 못하는 대신 논문체로 또는 소극적으로 성격에 대한 의욕을 표명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은 성격에 대한 의욕이라느니보다도 성격에 대한 동경과 애수이다. 하나는 그저 굳세인 성격을 잡아보았으면 하는 동경과 희원(希願)이고 또 하나는 용해된 성격의 물 우에 떠서 혹은 부서진 성격의 폐허에서 성격 결무감(缺無感)을 부디안고 비탄하는 애수다. (!:인용자)
[…] 물론 우리는 현대인의 신경이 이러한 성격이 아닌 성격―말하자면 성격의 의태에 대하야 얼마나한 동경을 가지고 있고 또 어째서 그러한 동경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결국 낭만적 소설의 심리적 과잉에 식상된 현대독자가 우선 무엇보다도 행동을 갈망하는 소치이니 탐정소설의 보편적인 기와 일맥상통되는 데가 있고 더욱히 전연 사고의 습성을 가지지 않은 야생인의 도박과 결투와 살인을 즐겨서 그리는 헤밍웨이나 폴크너 등의 소위 <아메리칸 리아리즘>의 비상한 인기와는 직접적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아모리 억세고 매력적이라 하야서 그들을 성격이라 부를 수는 없다.
[…] (이들이)표명한 것은 성격에 대한 단순한 의욕이다. 그러나 작품을 더 자세히 음미하야보면 그것은 의욕이라느니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에세틔시즘―강렬성에 대한 심미―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선악의 피안에 있는 갈열(渴熱)한 개성에 대한 동경―그것은 강렬성에 대한 낭만적인 도취와 무엇이 다른가? […]
「불란서에 있어서 오십년 동안의 예술적 감수성의 역사는 남성적 동포성의 사(死)의 고민(??:인용자)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동포성의 정말의 적은 이십세기 전체를 통하야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야 일어난 개인주의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랴는 의사 보다는 차라리 남과 달라져 보겠다는 광신적인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예술적 개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안전장치가 내면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감성과 꿈의 세계 이외에선 안정치 못한다. 개인은 집단적 생활에 대립되는 거지만 그러나 집단적 생활에 의하야 양육된다. 인간이 무엇에 반대하느냐는 무엇이 그를 기르느냐하는 문제보다도 중요치 않다. !!!!!:인용자) […] 19세기의 작가는 사회와 분리되여있다. 작가가 그의 사회와 분리될제 그의 본질적인 표현은 영웅적이 아닐 수 없다. 인간됨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포와의 정신적 교통을 심화하는데 의해서 인간되는 것은 동포와의 차이를 조장하는데 의해서 인간되는 것보다도 결코 더 어렵지는 않다. 전자는 후자에 못지않은 힘으로써 그를 기를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힘과 또 그 자신을 초극하고 창조하고 발명하고 이해하는 힘을 준다.」
[…] 내가 여기서 주목하랴는 건 성격을 창조하는 힘은 사회적 집단생활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간된 소이는 즉 완전한 성격이란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창조하고 발명하고 이해하는>인간이라는 두 가지 점이다. 여기서 성격의 내면성과 외면성, 그리고 성격구성에 있어서의 사회와 개인의 교섭의 문제가 일어난다. […]
끝으로 결론을 지은다면―현대는 성격창조가 없이 성격에의 의욕만이 있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것을 또 뒤집어 말한다면―현대에 있어 성격창조는 지난하지만 성격의 중요성에 대한 작가의 신념만은 변함이 없다.
: 최재서,「성격에의 의욕―현대작가의 집념」,
『인문평론』1호(1939), 26-34쪽.
나는 앞서서 현대생활에선 성격의 유지가 곤란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현대소설은 근본적으로 곤란하였다는 것이 이상 설명에서 충분히 명백하여질 터이다. 소설은 성격관찰에서 출발되였고 성격창조를 중심삼아 발달되어 왔다. 그러나 작가가 실재에서 성격을 잡기가 곤란하다면 그의 소설이 근본적으로 곤란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같이 시대와 정세는 변하였지만 성격의 중요성에 대한 작가의 신념만은 변함이 없다. […] 성격구성이 실재적으로 곤란 내지 불가능할 때 작가의 성격에 대한 의욕은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고 심지어 악몽으로 변한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성격창조를 못하는 대신 논문체로 또는 소극적으로 성격에 대한 의욕을 표명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은 성격에 대한 의욕이라느니보다도 성격에 대한 동경과 애수이다. 하나는 그저 굳세인 성격을 잡아보았으면 하는 동경과 희원(希願)이고 또 하나는 용해된 성격의 물 우에 떠서 혹은 부서진 성격의 폐허에서 성격 결무감(缺無感)을 부디안고 비탄하는 애수다. (!:인용자)
[…] 물론 우리는 현대인의 신경이 이러한 성격이 아닌 성격―말하자면 성격의 의태에 대하야 얼마나한 동경을 가지고 있고 또 어째서 그러한 동경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결국 낭만적 소설의 심리적 과잉에 식상된 현대독자가 우선 무엇보다도 행동을 갈망하는 소치이니 탐정소설의 보편적인 기와 일맥상통되는 데가 있고 더욱히 전연 사고의 습성을 가지지 않은 야생인의 도박과 결투와 살인을 즐겨서 그리는 헤밍웨이나 폴크너 등의 소위 <아메리칸 리아리즘>의 비상한 인기와는 직접적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아모리 억세고 매력적이라 하야서 그들을 성격이라 부를 수는 없다.
[…] (이들이)표명한 것은 성격에 대한 단순한 의욕이다. 그러나 작품을 더 자세히 음미하야보면 그것은 의욕이라느니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에세틔시즘―강렬성에 대한 심미―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선악의 피안에 있는 갈열(渴熱)한 개성에 대한 동경―그것은 강렬성에 대한 낭만적인 도취와 무엇이 다른가? […]
「불란서에 있어서 오십년 동안의 예술적 감수성의 역사는 남성적 동포성의 사(死)의 고민(??:인용자)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동포성의 정말의 적은 이십세기 전체를 통하야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야 일어난 개인주의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랴는 의사 보다는 차라리 남과 달라져 보겠다는 광신적인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예술적 개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안전장치가 내면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감성과 꿈의 세계 이외에선 안정치 못한다. 개인은 집단적 생활에 대립되는 거지만 그러나 집단적 생활에 의하야 양육된다. 인간이 무엇에 반대하느냐는 무엇이 그를 기르느냐하는 문제보다도 중요치 않다. !!!!!:인용자) […] 19세기의 작가는 사회와 분리되여있다. 작가가 그의 사회와 분리될제 그의 본질적인 표현은 영웅적이 아닐 수 없다. 인간됨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포와의 정신적 교통을 심화하는데 의해서 인간되는 것은 동포와의 차이를 조장하는데 의해서 인간되는 것보다도 결코 더 어렵지는 않다. 전자는 후자에 못지않은 힘으로써 그를 기를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힘과 또 그 자신을 초극하고 창조하고 발명하고 이해하는 힘을 준다.」
[…] 내가 여기서 주목하랴는 건 성격을 창조하는 힘은 사회적 집단생활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간된 소이는 즉 완전한 성격이란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창조하고 발명하고 이해하는>인간이라는 두 가지 점이다. 여기서 성격의 내면성과 외면성, 그리고 성격구성에 있어서의 사회와 개인의 교섭의 문제가 일어난다. […]
끝으로 결론을 지은다면―현대는 성격창조가 없이 성격에의 의욕만이 있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것을 또 뒤집어 말한다면―현대에 있어 성격창조는 지난하지만 성격의 중요성에 대한 작가의 신념만은 변함이 없다.
: 최재서,「성격에의 의욕―현대작가의 집념」,
『인문평론』1호(1939), 26-34쪽.
"성격"에 이토록 무섭게 집착하는 광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몇 가지로 간추려보자.
첫째, 일제 시기 대부분의 평론이 그렇듯 합법적인 정치 공간이 없는, 그를 보장할 국가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걸 수 있는 변혁의 대상은 고작해야 '심리', '성격'일 수밖에 없다. 물적 토대와 관련한 사회과학적 해결의 통로는 애초에 그렇게 제한돼버려도 된 셈이다.
둘째, 그리고 그 '성격'이 "개인"의 것이 아닌 '집단', 혹은 "민족"의 그것으로 일임되고 전유되고 있다. "민족"의 "성격"을 "초극"하여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집단적 생활"을 경험케 해야 한다고 설파할 정도로, 익숙치 않았던 근대적 "개인"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게 컸다. 일제 시기 다수의 저작들이 일명 '서구식 개인주의'에 치를 떨고 있다는 점은 최근의 탈민족주의 사조에 양질의 떡밥을 제공한다.
셋째, 앞으로 돌아가서, 그 실을 "심리"의 발전을 근대적으로 관철해나가는 데서 찾고 있는 점. 모든 근대국가가 '심리'의 발전을 주창하지만, 정치경제적 토대와 심리가 근대의 옷을 함께 입지 않고, 전자가 핍진함에도 후자의 발전'만' 유독 강요되고 채찍질된다면 그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파시즘으로 이행하기 참 쉬운 소지를 안고 가는 셈이다. 쉬운 예를 들어, 예리해진 신념으로 뛰어넘지 못할 게 무어겠냐마는, 신념의 첨예함으로 모든 물적 토대의 장벽을 뚫고 살아남길 바라는 사회가 다수에게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 나름도 그들로서는 '근대'에 대한 지사풍의 희구다. 최소한 심리, 성격에서만큼이라도 어떻게든 근대풍의 체계화, 세분화를 달성하고 싶은 마음, 파시즘이 어떤 신념에 의해 지탱되었다면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였을 것이다. 심리에 대한 모더니즘적 관철이 어떻게 낭만적 파시즘에 복무하게 되는가, 근대에 대한 제 나름의 눈먼 신념이 어떤 식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되는가.
그 구조를 파헤치는 것은 내 능력 밖이고 앞으로의 과제지만, 최소한 그 핵심에 있는 것은 근대에 대한 "의욕"이자 "집념"이다. "성격"을 바꿔서라도 무언가에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 그 과정에서 '근대'를 내보이기 위해 빌어온 서구의 개념어들은 일본에서, 국내에서 수많은 의미의 변곡을 경험한다. 자유, 민주, 인권, 객관… 그 가운데, 혹은 그 속에서, 혹은 그 속에서'만' 그들의 체계와 논리는 그야말로 '근대적'으로 공교로워진다. 몇몇 신념에 어린 이 땅의 우파들이 떠오른다.
넷째, 조선왕조 5백년의 주자학 질서는 조선인의 사상 속에 뿌리깊은 주의주의를 남겼다. 5백년동안 그 어느 나라보다 공교로운 성리학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것도, 또 그것이 그리는 세계에 자족해 그 외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너무도 지나치게, 공자님의 말씀으로 사셨던 분들이다.
세상이 어지러이 돌아가는 것이 어떤 '말씀'의 한 끗이 뒤틀어졌기 때문이라 믿는 것, 번연한 "사실"조차도 "성격에 대한 동경과 애수"로 해석되는 일은 조선왕조가 패망한 이후에도, 아니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이 땅에 빈번히 일어났던 일은 아닐까. 어떤 신념이 제 깜냥 이상으로 부풀려지면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주체사상에 매료된 북의 인민들은 주관적으로 행복할지는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는 불행하다. 주의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장 객관화하기 어려운 '사상'을 그들의 삶의 축으로 놓음으로써 끝내는 그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눈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땀에 어린 몇몇 좌파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고백하자면, 나는 바싹 마른 사회과학의 연구성과들을 잘 못읽어내는 버릇이 있다. 그 가운데 한 줌이라도 어떤 '사상'의 색채가 가미된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 나는 그 버릇이 신경질적으로 싫어졌는데, 그 이유가 대충 위에 쓴 저런 이유들과 맞닿는 것도 같다.
또 고백하자면, 내 관심사는 '사상사'이고, 그 가운데에는 사회 공동의 '상식'을 희구하는 바람과 함께, 혹시 이 모든 것이 어떤 사상 하나가 뒤틀려서가 아닐까 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다. 사람들이 공동의 기반을, 상식을 갖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이 글에서처럼 "성격"으로 쉽게 전화될 경우 부작용은 심각해진다. 어느 곳이든 정치와 경제가 들어앉을 자리에 사상이 치세하면, 그 최후는 피라미드 사업에 종사하는 가장의 가족로맨스처럼 눈물겨이 너절해진다. 사상만큼 제 깜냥을 잘 알고 있어야는 것도 없다. 듣자하니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오늘내일 하신다고 한다.
- 20080910, crying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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