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 도시오,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by cryingkid

다른 이를 대할 때, 내가 알던 내 모습을 고수하려 머리부터 굴리지 마라. 상대에 집중해라. 어차피 상대에게 나는, 내가 생각해오던 내 모습만 노출되는 게 아니니까. 나는 내 모든 것들을 미리 생각해둘 수 없고, 남들에게 엿보일 내 모습은 언제나 내 생각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나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나의 모습에 겸허해져야 한다.

주체가 분열되었다는 건, 그럼으로써 이전에 알던 나와는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전까지 유지해오던 평온한 나를 더는 유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자기가 몸소 분열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처럼 뼈저린 과정이다. 그를 통해 내가 생각하기 전에 처해있던 '나'를 보는 것이다. 이는 곧 '나'를 내 생각에 갇힌 존재에서 이미 관계에 노출되어 있던, 내가 알아가야 할 존재로 바꿔두는 것이고, 이는 또한 내가 이전보다 넓은 지평에서 한층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나에게 매여있을 어떤 관계의 얼굴을 보려고 하기도 전에, 내가 알고 있던 내 모습을 신주단지처럼 붙들려 하지 마라. 그로부터 모든 기만이 시작된다. 그리되면 먼 훗날에, 나는 내 생각과는 턱없이 다른 내 형편과 그로부터 어긋났을, 방향이 잘못되었던 내 노력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떠하다'는 정체성의 논지는 그래서 늘 미괄식이어야 하고, 더불어 늘 열려있어야 한다. 물론, '열려있는 나'를 미리 상정해놓고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를 두괄식으로 놓는 것이다. 나는 언제 닥칠지 모를 '낯섦'의 존재 앞에, 그리고 그로 인해 변해버릴 내 모습 앞에 겸허해야 한다. 거기서 내가 원래 '열려있으려던 사람'이라 채근해봤자 그 자리에 있던 '나'에게 자연스레 밀려왔을 배움의 과정만 이리저리 왜곡될 뿐이다.

'나'를 털어낸다는 건 그런 거다. 알고 있던 나를 털어냄으로써, 내가 모르고 있던, 세상 속에 처해 있던 나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를 내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이끌려면 이끌수록, 나는 더더욱 많은 것들을 배우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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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전후 일본이 자신들의 죄과를 진정으로 반성하지 못하는 이유로 이것을 꼽았다.
참고로 이 책은 학술서이고, 티 테이블용 연애 도서가 아니다.
(물론 윗글은 내가 쓴 것이고, 책에는 윗글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제목에서 언급한, 저자가 비판하는 두 학자는
수많은 후학과 팬을 거느리고 있는 저명한 사상가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존경하는 학자로 나는
주저없이 마루야마 마사오를 꼽고는 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국사학도가 한번쯤은 꿈꿀 이상향,
그네들의 역사를 통해 연역된 한국 민족의 어떤 '특수성'을 밝혀보는 것이
그것은 한번 세워진 즉시 다시 무너뜨려야 할 정체성에 불과하다는
여성주의 사회학자 선배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관계 속에 이미 '처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선행한다는,
근대 주체의 알량한 깜냥을 비웃으며 어떨 때는 숫제
중세 신학서적의 향기마저 풍기던 레비나스의 경구를 
현대에 알맞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과문하나마 '탈근대'와 얽힌 역사서술 중에 가장
설득력있게, 실체감 읽게 읽었던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덧글

  • 들꽃향기 2010/02/04 02:27 # 답글

    개인적으로 저는 이책을 한때 오오츠카 사학에 많은 감명을 받았던, 우리네 사학계에게도 필요한 책이라고 봅니다.

    사실 오오츠카가 지향하던, 사적소유론에 입각한 근대로서의 지향론이나 변경혁명론은, 당시 한국 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말이죠...ㄷㄷ
  • cryingkid 2010/02/04 09:43 # 삭제

    제 관심사가 해방 전과 해방 후 조선의 '연속'되는 면모인데, 그와 관련해 많은 모티브를 얻었던 책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조선은 일본 이상으로 성찰이 봉쇄되어온 측면이 있지 않나 싶어서요. 물론 빨갱이 학살과 한국 전쟁의 변수가 너무 크긴 했겠지만요.
  • 릴리트 2010/04/15 11:32 # 답글

    학술집이라던가는 잘 모르지만, 이 글을 읽고 뭔가 부끄러운 느낌이 들게 하는 몇 문장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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