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나라는 지성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성인은 모름지기 사람들의 삶 이면을 이야기해야 하고(왜?), 사람들에게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왜?), 그러기 위해서 무뎌지지 않을 감수성이 필요한 것인데(대체 왜?), 이 나라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는 것은 죄악이다. 체제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국민정서의 그늘을 들추는 순간 그는 이방인이 된다. 분위기 타고 탄력받아 가는데 왜 초를 치냐고, 왜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랑은 맨 딴 소리만 하냐고, 비틀어졌다고, 인간관계와 인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찍힌다.
그래, 그럴 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긴 긴 시간이 지나고, 이제 진실을 말하지 말라 득달하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진실에 귀기울이는 사람들 또한, 사라졌다. 전날 핍박받고 살았던 사람의 수기가 아무리 출판돼도, 사람들은 그걸 챙겨읽지 않는다. 제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거리에서 아무리 외쳐봐도, 심지어 여의도 공터에 십만 명이 모여 스크럼을 짜도, 사람들은 거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
사람들은 바쁘다. 제 먹고 사는 문제에 신경을 쏟기에도 바쁘다. 지난한 삶이 뭔가 이상해서 고개들어 이유를 궁금해하다가도, TV에서는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기 영역을 일군 신화들이 차례차례 방영된다. 그러면 그런 의구심 같은 건 전력을 다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핑계같아 보이고, 그걸 보고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한다. 과연 얼만큼, 언제까지 열심히 살아야 되는지, 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과연 우리나라 인구 중 몇 퍼센트가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뛰어넘어 훨훨 날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아무도 모른다.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데 눈돌릴 여유가 없다. 여유가 있더라도 그런 전력투구심을 해치지 않는 말랑말랑한 것들만 주워섬겨야 하므로, 그들은 말랑말랑하지 않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역사에 무관심하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일그러져 있든, 왜 이렇게 일그러졌을까에 관계없이, 중요한 건 그 세상을 어떻게 뛰어넘느냐, 어떻게 아랑곳않느냐 - 이기 때문이다. 이미 뛰어넘은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어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을 원망하기 보단 그 세상을 보란듯이 넘지 못한 팔자를 원망한다.
그들은 세상에게서 기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아무 발전도 바랄 수가 없다. 세금을 왜 내는지 모르겠으므로 모 대기업에는 세금 안 내는 방법을 전문 연구하는 부서가 설립된다. 그것도 자기 능력일 뿐, 흉은 아니다. 이 나라 교육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민가면 그만이고, 못 가면 자기 능력이다. 먹고 사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에겐 공공의식이 없다. 있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된다. 집안의 진실은 있어도 공공의 진실은 없다. 모든 것이 팔자로 귀결된다. 사회의 정의보다 그 부정의속에서 살아남는 능력이 더 추앙되는 곳에서는 차라리 사회가 어지러운 편이 제 능력 발휘를 위해 좋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보다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중요하니까, 세상의 이면이나 역사는 모를수록 좋다. 괜히 그런 거 알면 김샌다. 역사는 잊혀진 것이 아니다. 공공연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진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진실은 손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줍지 않는다.
해방 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걸 꾸미고 조장한 이 땅의 가해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아본 적이 없다. 그들이 집권했을 때는 총칼이 무서워 말 못했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억울한 입들이 열려 그 부당함을 외쳐도 이번엔 사람들이 듣지 않았따. 아무리 충격적인 진실을 코 밑에 들이대도,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렸다. 알아도 잊어버린 사람 앞에서 더 무엇을 이야기하랴. 진실은 촌스럼이고, 역사는 뒷북이다. 아는 것은 죄악이고, 잊어버림이 미덕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 편히들 산다.
그래, 당신들은 성공했다. 이 대한민국을 enjoy하는데, 한달에 책 한권 사보지 않는 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축하드린다. 혹시라도 이 사람들이 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왜 세상이 이렇게 빡세졌을까를 더듬어본 다음, 해방 후의 역사와 정치판의 웃기고 자빠라짐을 꿰뚫고 세상과 사람을 멋대로 주무른 당신들을 정확히 겨냥하는 그 날이 올거란 희망은, 차라리 안 가짐만 못하다. 그러니, 축하드린다.
편하게 편하게 살자. 혹시 진짜 몰라서 모르는 거면 모를까, 알아도 똑같은 걸 뭐. 이데올로기는 서툴렀어도 헤게모니는 완벽했다. 만날 천날 저리 나가서 시위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책은 뭐하러 읽나. 그 시간에 일터 나가서 처세술이나 더 배우지. 차피 제 먹고 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안쓰는 세상에 이리 틀리나 저리 틀리나, 걸리면 제 팔자고 안걸리면 용한거지, 그리고,
오늘도 거리는 조용하다. - 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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