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序
운동권을 까는 건,
운동권이 저항한다는 그 드높은 체제를 까는 것보담은 훨씬 쉬운 일이다.
_
한때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왜 운동권은 구려도 운동권 사람들은 좋은 걸까.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렇다. 운동권 사람들이 좋다고 운동권이 좋아지는 건 또 결코 아니다.
기실, 한 조직에서 ‘사람좋음’을 내세워 그것으로 조직력을 연명하는 건 그 조직이 이미 갈 데까지 갔다는 걸 증명한다. 이미 여타의 의미가 나올 건덕지가 조직 내에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운동권들이 그들의 사유방식을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건,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을 신경쓰고 있다는 ‘믿음’이 깨지길 두려워하는 탓이다.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다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신경쓰고 있다는 '믿음'에 안도할 제 자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틀렸다니, 말도 안돼. 내가 여지껏 써왔던 신경이 공염불이었다니, 그럴 리 없어. 난 세상을 신경써왔어. 난 충분히 도덕적이었다고!”
자신이 도덕적이란 확신은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와 상관없이도 성립 가능하다. 그것이 일치하리란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했지만, 그게 삽질일 수도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고 그게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분은 나쁘다. 그리고 그 기분나쁨은 제 도덕성의 인질로 잡고 있던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도덕성과 그것의 기반인 타인은 서로 얼마든지 배치될 수 있고, 그럴 경우 사람들은 보통 전자를 선택한다. 타인보단 도덕적으로 고양된 자기 자신이 중요하니까. 그들이 10년동안 별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사람을 담보로 잡은 비싼 지적 유희이므로 쉽게 그만두기도 힘든 것이다. 이 생각을 포기하는 것은 곧 담보로 잡은 그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 분명하다. 순간 나의 어리석음을 포함한 일거수 일투족이 자못 비장해진다. 아무런 요령없이 대부분이 하려하지 않는 걸 하려는 것만으로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밋밋한 일상에 갑자기 사명감이 찾아온다.
그래, 중요한 건 그것이다, 사명감의 빽이 돼줄 그럴싸한 근거. 그들은 그들의 사명감과 다른 사람 사이의 헐거운 접점 하나에도 만족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단 하나의 '일리'가 그들을 안도케 할 것이다.
혹은, 그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의 면전을 외면하기가 면괴스러울 수도 있다.(이런 걸 속칭 ‘조직화’의 결과, 시쳇말로 ‘말렸다’고 부른다) 사실은 아무런 인과도 없는 그 사람들과의 친분이 강철같은 도그마의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뭐 그래, 다 좋단 말이다. 세상을 담보로 놓고 취미치레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이들은 너무 소중한 것들을, 그래서 위험한 것들을 담보로 놀고 있다. 깨였다는 사람들이 흔히 걸치는 '소수자에 대한 애정' 뒤에 숨어 신념이고 조직이고 모두 기이하게 부풀어오르는 동안 사람들은 너무 부풀어오른 그 반죽과 함께 선한 사람들의 ‘소수자에 대한 애정’까지 폐기처분한다. 똑똑하단 사람이 흔히 꿰차는 ‘비판적 지지’ 뒤에 숨어 일자무식 촌부들 턱에도 안닿는 삿대질을 일삼을 동안 사람들은 뭘 해도 지랄이더라는 냉소와 함께 건강한 ‘비판’의 가치까지 함께 내다버리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놀이’가 그토록 위험한 이유이다.
세상 꼬인 거 모르는 사람 없다. 그 꼬인 위치 속 끊기는 선 사이사이에 우리 부모님네들은 집짓고 살아왔다. 그러니 생색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 안다. 자본주의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본주의 타도가 얼마나 가소로운 구호로 들릴 지 한번쯤은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설령 실낱같이 이어져 겨우 가닿는 일리일지언정 그들의 마음이 진심일 수는 있다. 진심이 아닐 수도 있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 허나 부모 밑에서 깝치는 자식들처럼 그래도 쟤네들이 세상 걱정한다고 뭔 짓을 하든 ‘봐주기’로 큰 게 벌써 십년째다. 핑계야 얼마나 많은가, 현장에 떨어진 증거는 수사력을 능가할 만큼 많다. 생판 모르는 사람 내 자식처럼 '봐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입이 없어서, 깔 거리가 없어서 가만 있은 게 아니다. 쪽팔리는 줄 알아야 된다.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동네 어귀의 장승처럼 세상 구름 다 인 듯이 쭈그리기 전에 자신이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범위부터 똑바로 챙기시라고. 당신들은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그것도 꽤나 위험한 것들을 손에 쥔 채로. 오지랖 넓은 게 자랑인 줄 아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민폐다.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대학에서 조낸 똑똑한 척 앞서서 얘기하는 인간들보다 사회참여적 지식이 없으면서 지 고민이라도 똑바로 챙기는 인간이 차라리 전자보단 몇 배 알차고, 덜 위험하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20070222, cryingkid
(08.9.25. 부분 퇴고)
운동권을 까는 건,
운동권이 저항한다는 그 드높은 체제를 까는 것보담은 훨씬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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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왜 운동권은 구려도 운동권 사람들은 좋은 걸까.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렇다. 운동권 사람들이 좋다고 운동권이 좋아지는 건 또 결코 아니다.
기실, 한 조직에서 ‘사람좋음’을 내세워 그것으로 조직력을 연명하는 건 그 조직이 이미 갈 데까지 갔다는 걸 증명한다. 이미 여타의 의미가 나올 건덕지가 조직 내에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운동권들이 그들의 사유방식을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건,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을 신경쓰고 있다는 ‘믿음’이 깨지길 두려워하는 탓이다.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다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신경쓰고 있다는 '믿음'에 안도할 제 자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틀렸다니, 말도 안돼. 내가 여지껏 써왔던 신경이 공염불이었다니, 그럴 리 없어. 난 세상을 신경써왔어. 난 충분히 도덕적이었다고!”
자신이 도덕적이란 확신은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와 상관없이도 성립 가능하다. 그것이 일치하리란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했지만, 그게 삽질일 수도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고 그게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분은 나쁘다. 그리고 그 기분나쁨은 제 도덕성의 인질로 잡고 있던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도덕성과 그것의 기반인 타인은 서로 얼마든지 배치될 수 있고, 그럴 경우 사람들은 보통 전자를 선택한다. 타인보단 도덕적으로 고양된 자기 자신이 중요하니까. 그들이 10년동안 별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사람을 담보로 잡은 비싼 지적 유희이므로 쉽게 그만두기도 힘든 것이다. 이 생각을 포기하는 것은 곧 담보로 잡은 그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 분명하다. 순간 나의 어리석음을 포함한 일거수 일투족이 자못 비장해진다. 아무런 요령없이 대부분이 하려하지 않는 걸 하려는 것만으로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밋밋한 일상에 갑자기 사명감이 찾아온다.
그래, 중요한 건 그것이다, 사명감의 빽이 돼줄 그럴싸한 근거. 그들은 그들의 사명감과 다른 사람 사이의 헐거운 접점 하나에도 만족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단 하나의 '일리'가 그들을 안도케 할 것이다.
혹은, 그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의 면전을 외면하기가 면괴스러울 수도 있다.(이런 걸 속칭 ‘조직화’의 결과, 시쳇말로 ‘말렸다’고 부른다) 사실은 아무런 인과도 없는 그 사람들과의 친분이 강철같은 도그마의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뭐 그래, 다 좋단 말이다. 세상을 담보로 놓고 취미치레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이들은 너무 소중한 것들을, 그래서 위험한 것들을 담보로 놀고 있다. 깨였다는 사람들이 흔히 걸치는 '소수자에 대한 애정' 뒤에 숨어 신념이고 조직이고 모두 기이하게 부풀어오르는 동안 사람들은 너무 부풀어오른 그 반죽과 함께 선한 사람들의 ‘소수자에 대한 애정’까지 폐기처분한다. 똑똑하단 사람이 흔히 꿰차는 ‘비판적 지지’ 뒤에 숨어 일자무식 촌부들 턱에도 안닿는 삿대질을 일삼을 동안 사람들은 뭘 해도 지랄이더라는 냉소와 함께 건강한 ‘비판’의 가치까지 함께 내다버리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놀이’가 그토록 위험한 이유이다.
세상 꼬인 거 모르는 사람 없다. 그 꼬인 위치 속 끊기는 선 사이사이에 우리 부모님네들은 집짓고 살아왔다. 그러니 생색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 안다. 자본주의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본주의 타도가 얼마나 가소로운 구호로 들릴 지 한번쯤은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설령 실낱같이 이어져 겨우 가닿는 일리일지언정 그들의 마음이 진심일 수는 있다. 진심이 아닐 수도 있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 허나 부모 밑에서 깝치는 자식들처럼 그래도 쟤네들이 세상 걱정한다고 뭔 짓을 하든 ‘봐주기’로 큰 게 벌써 십년째다. 핑계야 얼마나 많은가, 현장에 떨어진 증거는 수사력을 능가할 만큼 많다. 생판 모르는 사람 내 자식처럼 '봐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입이 없어서, 깔 거리가 없어서 가만 있은 게 아니다. 쪽팔리는 줄 알아야 된다.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동네 어귀의 장승처럼 세상 구름 다 인 듯이 쭈그리기 전에 자신이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범위부터 똑바로 챙기시라고. 당신들은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그것도 꽤나 위험한 것들을 손에 쥔 채로. 오지랖 넓은 게 자랑인 줄 아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민폐다.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대학에서 조낸 똑똑한 척 앞서서 얘기하는 인간들보다 사회참여적 지식이 없으면서 지 고민이라도 똑바로 챙기는 인간이 차라리 전자보단 몇 배 알차고, 덜 위험하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20070222, cryingkid
(08.9.25. 부분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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